2 Hrs to 2 Wks - (P)oetry 시

P004.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손택수

TMLove 2025. 3. 31. 12:37

 

...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온 내게 무슨 그리 간절한 기억이 있을까마는

어느 한쪽만 생생한 그건 이별 때문

출가를 하듯, 이별의 순간에 전생이 멈춰버렸기 때문,

그런 사랑이 있다 단 한 번만이 허락되는 이별을 통해서만 

간신히 다가갈 수 있는 사랑,

 

시한에, 눈발에 감긴 귤등 몇을 품고 잠든 마을 겨울밤이

아직 그대로다 

 

-<동백에 들다 20> 부분 발췌

 

<동백에 들다 20>

 

3월에 고른 시집은 손택수 시인의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

2022년 11월 14일 1판 2쇄본. 

 

시집 한 권에 담긴 대부분의 시들이 주옥같아서 

감탄사만 줄지어 내뱉다 질투와 동경에 우왕좌왕했다.  

 

얇은 시집 한 권을 한 달 동안의 기간을 두고 읽기로 마음 먹은 건,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하루에 몇편씩만 읽어도

한 달에 너댓번 재독할 수 있으리라는 산술적 계산이 있었다.

최소 밑줄을 그은 문장들은 반복적으로 읽어

다 쓰러져가는 기억력에 좋았던 흥이라도 남겨놓으려 했는데

짬을 많이 내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한번 완독에 한 달을 모두 소비할 줄은 몰랐다. 

 

얼만큼 읽고 다시 쓰고 몇번의 퇴고를 거쳐야 이런 문장들이 생산 가능할까. 

머릿속 계산이 공허하게 돈다.

내 능력으로는 버거울까. 가능할까. 어나더 레벨인가.  

셀 수 없이 쓰고 고치는, 반복해야 할 그 지난한 작업을

엄두조차 쉬이 내지 못하며 간만 보고 있다. 

잃어버린 꾸준함과 집중력을 체력 바닥에 탓하고 

어휘력 빈곤이 발목을 잡는다고 궁시렁 거리고 

내탓 남탓 그러다 이번 달도 한편의 시 조차 쓰지 못한 나는 

제어가 불가능해진 미친 세월의 속도에 잡문 몇을 적다 시무룩해졌다. 

 

손택수 시인은 1998년에 등단했다. 

국민정부의 시대, IMF 외환위기, 구조조정과 실업대란,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던 1998년

대학을 갓 졸업한 그때부터 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찾아보니 그의 시 <나무의 꿈>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유명한 이름이었나 보다. 

 

내 깊은 찬사는 성향에 맞은 탓일 수 있다. 

감정을 동요시키는 서정적인 문장들에 홀려서

여전히 시를 품게 되는 증거가 되었고,

AI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시가 살아남을 가치를 보여주는 예제였다.

 

평소에 쓰지 않는 단어들이 시에 중요 축을 차지하면서

단어가 주는 파장을 몸이 기억하게 하는 건 시의 마법이 아닌가 싶다.  

그가 쓴 엇결, 얼핏, 모조품, 상투 같은 단어들이 가슴에 박힌다. 

 

<완전한 생>이란 시의 결말에서 씌인 엇결이라는 낯설음,

 

나란 늘 엇결 같은 것인가

엇결의 불일치로 결가부좌를 튼 것이 나인가

조금씩은 늘 허전하고, 부끄럽고, 불만스러웠으나

조금씩은 어긋나 있는 생을 자전축처럼 붙들고 회전하면서 

 

<왔다 간 시>에의 서두와 결말에서 씌인 얼핏이라는 무게,

 

너무 정색하고 보지 마라

뭔가가 내게 올 때는 대부분 얼핏이었다

...

매사에 너무 뚫어져라 진지했던

내 사랑이 실패한 이유를 얼핏

알 것도 같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의 결말에서 비쳐지는 모조품의 가치,

 

왜 이 고통의 느낌마저 가공된 것만 같은 것인지

재주라곤 슬퍼하는 능력밖에 없건만

이 슬픔마저 왜 모조품 같은 것인지

그날 기념사진 액자를 벽에 걸었지

드라이버 끝에 십자형 나사

꾸욱 꾹 당겨진 근육이 골을 따라 회전할 때마다

쇳가루 눈물이 흘러나오던 나사렛

광화문 제단 너머 천국의 문까지 

 

<방의 모험>에선 '상투' 라는 단어가 상투적이지 않게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나는 보았다 오늘, 돌 갓 지난 아기가 서랍을 열고 닫는 것을,

열고 닫히는 서랍이 아이의 눈과 코와 귀를, 입술을,

열고 닫는 것을

...

상투적인 것이 어딨나 상투적인 눈이 있을 뿐이지

벽을 만나면 벽에 심장을 묻는다

심장을 품고 쿵쾅쿵쾅 뛰는 절벽이 된다

 

나는 보았다 오늘,

기껏 책냄새나 나는 나의 방이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을,

말들로 가득찬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을

 

 

오랫만에 시를 읽고 행복했다.

슬프고, 아프고, 쓰리고, 안타깝고, 기쁘고, 사랑스럽고, 

그런 모든 상투적인 감정들이 버무려져

눈으로 읽었으나 오감을 자극해버린 

어떤 시인의 멋진 시집을 마주한 3월이었다. 

 

 

필사하고 싶은 시들이 많았으나 짧은 시 하나를 선택했다. 

 

 

***

 

외로움도 이젠 섬의 차지가 아니다

 

애인이 생기면 무인도에 가서

배를 끊겠다던 청춘은

어디로 갔나

 

무인 카페에서 반나절 보내고

숙소는 무인 호텔, 슈퍼도 무인 점포

무인이 수두룩하다

 

천 리 만 리

가끔씩은 한밤에 혼자서

바다를 찾아가던 내가 그립다는 사람아

 

섬을 잃고 마침내 나는

섬이 되었다

 

- <고군산군도> 전문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 - 손택수 저

 

 

https://www.youtube.com/watch?v=qz1j4HCUtZ4&list=RDqz1j4HCUtZ4&start_radi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