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예르모 로살레스의 표류자들의 집을 읽었다.
열린책들이 출판한 세계문학 시리즈 168번째 소설로 2011년 4월 1쇄본이었다.

작가 기예르모 로살레스가 생전 남긴 저서는 단 두 권이었다. 그리고 국내에 번역된 책은 표류자들의 집이 전부였다.
집 바깥에는 <보딩 홈>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나는 이곳이 내 무덤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삶에 절망한 사람들이 흘러드는 변두리의 한 보호소.
대부분이 미친 놈들이었다.
더러는 승자들의 삶을 망치지 말고 외롭게 살다 죽으라며
가족들이 버린 늙은이들도 있었다.
"여기서 잘 지낼 게야."
고모는 최신형 시보레 운적석에 앉아서 내게 말한다.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너도 이해하게 될 게야."
...
-7 pg
첫 문장. 첫 문단. 그리고 첫 장. 천천히 읽다가, 형광펜으로 첫 페이지의 모든 문장을 색칠했다. 이로써 책은 중고마켓에서 중급 이하로 추락했다. 낙서로 인식될 밑줄에 묶여 가치가 상실된 존재. 내 서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웠다. 벗어나는 방법이라곤 기부 또는 재활용 박스에 들어가기, 그것도 아니면 세월이 흐른 뒤에 나와 함께 태워지는 것뿐이다.
필사를 하고 싶었다.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 이렇게 나를 흔드는 서두를 본 적이 없었다. 한없이 따라 쓰면 어떨까. 이렇게 압축된 간결한 문장을 남길 수 있는 능력이 생길까. 이 한 페이지로 책의 전부를 담았다. 소설의 탈을 쓴 시가 첫 문단에 들어왔다. 미치게 만들었다.
원제는 Boarding Home(영어판 제목: The Halfway House)이다. 보딩홈은 육체적·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사설 요양소이다.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인공 윌리엄 피게라스는 쿠바에서 탈출하여 마이애미 도착 후 정신적으로 극도로 쇠약해져 보딩홈에 거주하게 된다. 보딩홈에선 거주자에 관심이 없고 돈만 챙기는 집주인 캐브레라와 폭력적인 관리자 아르세니오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위생적이고 인간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제공하는 곳에서 사는 것이 익숙해질 무렵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새로운 거주자 프란시스를 만나게 된다. 그녀와 바로 사랑에 빠지고 둘은 보딩홈 탈출 계획을 짠다. 보딩홈으로 들어오는 그들에게 할당된 정부의 지원금 수표를 캐브레라한테 받아내어 집을 렌트해서 함께 살아갈 계획을 세운다. 실행 당일 수표를 받아내고, 프란시스를 기다렸지만 그녀는 오지 않았다. 뉴저지에 사는 그녀의 엄마가 다시 데려간 것이다. 그 후로도 윌리엄은 보딩 홈에서 계속 머물게 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거리로 나갈까? 방에 틀어박혀 있을까? 현관 베란다에 앉아 있을까?
나는 다시 거리로 나간다.
북쪽으로 갈까? 남쪽으로 갈까? 무슨 상관이람!
-74p
나는 일어난다. 교회 뒷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온다.
다시 플래글러 가를 걷는다.
다시 처음 보는 이발소들,
처음 보는 레스토랑들,
처음 보는 옷 가게들,
처음 보는 약국들을 계속해서 지나쳐 간다.
전진한다. 전진한다. 전진한다.
뼈마디가 쑤시지만, 나는 계속 더 전진한다.
23번가에 이르러서야 멈춰 선다.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펼친다.
태양을 쳐다본다.
보딩 홈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 p 78
소설의 분위기는 카뮈의 이방인이 연상되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소년 같기도 했다. 방황하는 청년이었다. 정신이 무너진 지식인이었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항하고 반항하고 싶으나 의지력을 잃은 망명자였다. 많은 책을 읽었고, 또 어떤 신념이 있었으나, 펼치고자 할 때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다수의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무너진 모습과 같았다. 거기에 더해,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된 지옥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삶이 이어졌다. 피폐한 정신과 사라진 희망. 견뎌내는 것 또한 삶을 이어가고자 했던 의지의 표현이었을까. 어렸을 때 읽었더라면 그의 상실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에야 겨우 공감할 수 있다. 품고 있는 어둠, 슬픔. 처절함 속에 하루하루 나아가는 생을.
번역하는 내내 어느 보딩 홈에 유폐되어 있는 상상을 했다. 그들의 침묵과 아우성이 귓가를 맴돌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나 역시 탈주를 꿈꾸고 있었다. 마이 애미는 어쩌면 사막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 그리고 그 위를 떠도는 정주하지 못하는 도시 유목민.
- 최유정 역자 작품 해설 [환멸의 미로에서 탈주를 꿈꾸다] 중
스페인어 문화와 문학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일을 한다는 옮긴이 최유정의 해설이 눈에 들어왔다. 번역이 훌륭해서 책이 더 와닿았을 수도 있었겠다. 번역책이 아닌 그녀가 직접 쓴 책도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찾지 못했다.


기예르모 로살레스 (Guillermo Rosales)
1946년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10대 때부터 쿠바 혁명에 투신해 농부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을 거둔 뒤 당의 장학생으로 법학과 외교학을 공부했다. 15세였던 1961년부터 〈청년 저항 연대〉의 기관지 「메야」의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날카로운 필력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해, 평생 정신분열증에 시달렸다. 혁명의 변질에서 오는 좌절과 악화되는 병세 속에서도 계속해서 글을 썼고, 1968년에는 소설 『영광의 토요일, 부활의 일요일』이 〈아메리카의 집 문학상〉 후보작으로 오르기도 했다.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환멸로 괴로워하던 로살레스는 스페인 마드리드를 경유해, 1980년 마이애미에 입성했다. 그로부터 7년 만에 내놓은 소설 『표류자들의 집』으로, 미국에서 스페인어로 쓰인 작품에 주는 문학상인 〈황금 문학상〉을 거장 옥타비오 파스의 시상으로 거머쥐었다. 한 평생 쉬지 않고 글을 쓰고도 자기 환멸에 사로잡혀 찢거나 태워 없애기를 반복한 탓에, 로살레스가 생전에 온전한 형태로 남긴 원고는 앞서 언급한 두 편뿐이었다. 1993년 7월 6일 아침, 마이애미. 로살레스는 권총의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고 〈총체적 망명자〉로서의 질곡 많은 생을 마감했다.
-저자 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표류자들의 집 | 열린책들 세계문학 168 | 기예르모 로살레스 | 알라딘US
표류자들의 집 | 열린책들 세계문학 168 | 기예르모 로살레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168권. 20세기 후반 쿠바 문학의 가장 빼어난 성과로 평가되는, 기예르모 로살레스의 대표작. 1987년 보딩 홈 Boarding Home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된 <표류자들의 집>은 쿠바 출
www.aladin.co.kr
'2 Hrs to 20 Days-(B)ooks 소설과 논픽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B018.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7) | 2026.03.09 |
|---|---|
| B017. 니클의 소년들 - 콜슨 화이트헤드 (6) | 2026.02.27 |
| B015. 나무를 심은 사람 - 장 지오너 (3) | 2026.01.17 |
| B014.연애소설 읽는 노인 - 루이스 세풀베다 (4) | 2026.01.12 |
| B013. 사막별 여행자 - 무사 앗사리드 (4) | 2025.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