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가 창문을 똑똑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륵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 <빗방울 하나가 5> 전문

6월에 읽을 시집으로 강은교 시인의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를 선택했다.
1999년 초판 발행본.
토요일 주말 반가운 여름비가 내리던 날
가방이 젖는 걸 모르고 비를 맞았다.
아이를 기다리며 읽으려고 시집을 챙겨 넣은 걸
뒤늦게 떠올렸다.
햇볕에 많이 노출되어 표지가 바래져 있던 시집은
속지가 살짝 젖었다가 말라 겹겹이 붙었다.
학창시절 밤을 같이 보내다 침을 잔뜩 머금은 교과서같았다.
한장 한장 떼내어 읽었다. 금새 마지막 장에 닿았다.
시집이란 존재가 원래 분량이 작지만 이 시집은 지나치게 얇았다.
93 페이지. 59편의 시.
게다가 그 중 한 두 줄 정도만 담긴, 하이쿠 같은 짧은 시가 일곱편이 포함되었다.
커버가 하드커버임을 감안하고, 저렴한 가격이긴 하나
단순해 보이는 시들이 적지 않아, 분량의 문제를 짚고 싶었다.
가볍게 읽으려고 골랐으면서, 그 문제를 묻는 것도
함축을 대표하는 시 앞에 가성비를 따지는 것도
상충되긴 하다.
사실 첫장에 씌여진 <빗방울 하나가 5> 를 읽을 때
비가 내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부풀어오른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며 한껏 충만한 감성에 휩싸이다가
너무 쉽게 흐트러진 탓일 수도 있겠다.
그랬는지 모르겠다.
예전 가요 앨범엔 타이틀곡이 항상 첫번째에 실렸었는데,
같은 의미인가 싶었다.
1945년생의 시인의 이름이 낯익어 웹서핑을 했더니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옮긴 이였다. 거기서 처음 이름을 들었을 수도 있겠다.
예전에는 라디오에서나 신문에서 책광고를 많이 했으니까.
1968년에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는데,
그 뒤로도 꾸준히 수상해오다가 작년까지도 대산 문학상을 받았다.
오랜기간 혈기왕성하게 작품활동을 이어오신 시문학의 거장에게
투정부리다가 멋적어졌다.
다음백과에서는 한과 허무주의, 불교의 윤회사상, 비극적 정서, 민초의 가슴에 진 응어리 등으로
시인의 작품세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초기 작품들에 특히 허무주의가 많이 보여진다는데, 작가의 작품세계를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눈다면
이 책은 그 중기 초기 쯤 어딘가의 과도기 적인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피카소의 화풍을 빌리자면 청색지대를 지나 장미시대의 끝자락 또는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려내던 큐비즘 초기 쯤일까.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에 의미를 부여하려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비 내리면 찬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 잎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전문
나는 시집 마지막에 의례히 자리하고 있는 평론가들의 해설은
대충 읽다 넘겨버리곤 한다.
어려운 말들이 많아 그 찬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고
해설을 읽다보면 시를 통한 내 상상과 다른 어떤 심오한 세계로 보내 놓으려 하는 까닭도 있다.
이 시집의 마지막 편에도 장문의 글이 적혀 있어 덮으려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강은교 시인의 산문이었다.
이책을 읽던 나의 마음을 예견했던 모양인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그녀는 첫장에 내가 <빗방울 하나가 5>를 좋아할 것이라는 추측했다.
그래고 너무 짧은 시들에 불만을 가지리라는 것도 예상하듯 "뭐 이래"하는 표정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당신은 안경을 쓰고 계시는 군요..."
...
"당신은 가방을 어깨에 길게 메고 계시는 군요..."
...
"...그러고 보니 당신은 지금 나의 시를 당신의 가슴속에서 이어붙이기를 하고 계시는 군요."
...
...이 세상에서 한순간 나와 비슷한 이미지의 숲에 빠진 당신을 만났다는 것,
이것이 당신과 내가 정신으로 화해하는 것이지요.
시가 제일 시다워지는 순간이지요...
나를 보고 있는 건가.
주술에 걸린 기분이었다.
불현듯 프린스의 <NEWS> 라는 앨범이 떠올랐다.
최애하는 뮤지션, 프린스가 홍보도 전혀 하지 않은 채 뜬금없이 정규앨범을 내서 구입했었는데
달랑 4곡에 죄다 10분이 넘어가는 연주곡이었다.
재즈, 락, 펑크, 앰비언트가 버무려진 실험적인 앨범을 듣고 나서
그 당황과 허무함을 기억한다.
그에게 기대했던 진한 소울 가득한 펑크와 가슴을 벌렁거리게 할 락 기타 연주는 어디가고
앰비언트에 재즈. 화려함을 배제된 느린 비트. 허무하리 만치 비어보이는 여백.
노래 <Kiss>에서도 그랬던 극한의 미니멀리즘이 전체 앨범에 투영되자 당혹했다.
그 실험 뒤 <Musicology>, <3121>, <Planet Earth> 등
평론가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정규앨범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NEWS>의 실험 과정이 발판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 제어와 조절의 과정처럼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가 놓여있는 중간 단계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의 작품과 최근의 작품들을 읽고 그녀의 세계를 이해해야 하겠다.
아쉬워
애착이 닿는 시 구절을 하나 더 적는다.
비가 오던 날 쓴 시라서
비가 오던 날 읽은 시라서
당신의 얄팍한 시집이 나의 얄팍한 마음에
꽂혔던.
도쿄의 네모칸 안에는 노란 해 밑에 파아란 구름이,
싱가포르 구름 밑에는 네개의 파아란 빗금이....
지금 베를린은 비가 오고 있겠구나, 누군가 붉은 우산을 썼겠구나,
어떤 시인은 비 오는 날의 시를 쓸데없이 쓰고 있겠구나,
그곳에서도 우산 한 개보다 필요없는 시를 쓰고 있겠구나.....
<버릇> 부분 발췌
https://www.youtube.com/watch?v=K31sJIbv_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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