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Hrs to 2 Wks - (P)oetry 시

P012. 발 달린 벌 - 권기만

TMLove 2025. 9. 15. 09:17

 

...
나는 진정한 연애를 꿈꿨고 열병의 타클라마칸을 횡단하고 싶었다 맨몸으로 바이칼을 헤엄치고 싶었다 아니 킬리만자로의 무산소층에서 막 핀 개나리 같은 하늘로 첫발을 들여놓고 싶었다 쉼없이 물을 마셔도 갈증으로 목젖이 내려앉는 타클라마칸에서 낙타는 목청껏 발을 굴린다 걸음을 떼는 순간 정복당한 킬리만자로는 다만 높이의 수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번 빠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바이칼은 발이 아니라 몸을 원한다 몸을 던지라고 시퍼렇게 눈뜨고 있다 죽음보다 깊은 연애처럼

-[바이칼 1] 부분 발췌

 

 

 

9월에 읽을 시집으로 권기만 시인의 <발 달린 벌> 2015년 8월 초판본을 골랐다. 

 

착시 현상인지 노안에 의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집을 고를 때 제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어이없게도 내 눈엔 분명,

<밥 딜런 별>로 보였다. 펼치기 전부터 머릿속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뮤지션 밥 딜런과 <별>의 알퐁스 도데를 연상하며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고 무조건 읽어야겠다고 싶었다. 

 

그런데 가만 다시 보니,

그런데 <발 달린 벌>이라니. 

이런 낭패가.

 

 

 

 

 

본의가 아니었겠지만 나를 기만한 시집 속 글은 복잡한 심경을 더욱 키웠다.

난해하기도 하고 무난하기도 하고

서정적이지만 서사적이기도 하고 

레트로하면서 트렌디하기도 하고

이국적인데 토속적이며 세계의 미지에서 펼쳐지는 기행( 紀行)이었고 그곳에서의 기행 (奇行)같았다. 코드 브레이킹이 필요할 것 같은 비밀을 간직한 시들은 아련한 서사로 나를 끌어들였다. 풀어냈다. 자신 못하는 문장을 붙잡고 온전히 이해 못하면서 감정이 전이된다. 마치 어린 시절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시청했던 무자막 외국영화에 눈물 흘렸던 때 같다. 타클라마칸, 킬리만자로, 블라디보스토크, 우름밤바, 마추픽추, 이런 이국적인 곳에서  그의 흔적을 추적하는 기이한 경험도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열차는 수전증 걸린 노인 같다
툰드라의 혹한이 창틈으로 세상 끝까지 옷깃을 세웠다
모든 경계를 다 지워야 도착한다는 꿈에서의 열흘

역사는 씩씩거림만 남은 주전자 바닥 같다
여행자로 살던 형은 왜 이 먼 곳에 와서 죽은 것일까
시체 보관소에 잠들어 있는 형은 너무도 편안했다
빙하의 바람을 뼈에 새기면 설국을 찾을 수 있다
갈겨쓴 글자가 설인의 흔적 같던 형의 엽서
...

-[설국] 부분 발췌

 

 

작가의 내력이 궁금했다. 아쉽게도 인터넷에 단편적인 것들만 찾아낼 수 있었는데 1959년생 권기만 시인은 2012년 54세의 나이에 등단하여, 2015년 57세에 첫번째 시집 <발 달린 벌>을 발행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10대부터 일을 했고, 보일러 기사가 되었고, 1986년부터는 울산의 현대자동차 동력팀에 근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울산 기능대 문예창작과를 수료하였고, 많은 습작들을 해왔다고 한다. 시집 말미에 실린 이홍섭 시인의 해설을 빌리면

 

'마치 시를 앞에 놓고 오랜 면벽을 거친 수행자와 같은 면모가 풍겨져 나온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독학으로 문청 시절을 보낸 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청신함과 남성적인 느껴진다.
홀로 절대를 향해 자문자답한 자의 고독이 서려 있다...'

 

 

오랜 면벽을 거친 수행자란 말에 공감했다. 그의 글에선 세월이 쌓아올린 깊은 내공과 끊임없는 세공으로 깎아낸 단단함이 있다. 출간된지 10년이 지났으니 현재는  67세가 되셨겠다. 십년의 사색과 십년의 내공이 더 늘었으니 다음에 출간될 시집이 더욱 궁금해진다. 지금 시집을 읽고 또 읽으며 기다리다가 신간이 나오면 무조건 구입해야 겠다.

 

...
내가 면회 온 무기수는 264
그의 죄목은 주저리주저리 청포도
나는 그것을 한 상자 훔치러 왔다
통념이 되면 너그러워지는 관례에 기대어
그가 훔친 것을 내가 다시 훔친다
글자와의 밀거래는 증거가 없으므로
아무도 그것을 시비 걸지 않는다
파아란 하늘색 안감으로 직조한 눈망울
내 안의 엉덩짝 파래질 때까지 바라보다
책을 덮으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하늘이 주저리주저리 파아란 날
무기징역 체험하러 도서관 간다

-[도서관 2] 부분 발췌

 

 

 

 

내게는 랭보의 시집이 없네 반항의 정복자가 밟은 언어의 고지가 없네 한 줄의 시를 막대기처럼 허공에 세워놓고 언어의 집이라고 선언하면서 그가 했을 법한 말을 중얼거려 보네 사람들은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껴입지 고독은 단단해지라고 준 선물이지만 소용없네 따뜻한 공기는 바깥에 있네 얼어죽었다고 이제 곧 얼어죽을 거라고 슬퍼하면서 랭보가 술을 마시네 랭보가 본 하늘을 한 번만 보았어도 막을 수 있는 참사를, 나무가 추모하듯 모자를 벗네 아아 하늘을 보지 않는 젊음이라니 
...

-[모자] 부분 발췌 

 

 

 

작가가 시를 쓰며 간직했을 감정을 보듬어보다가

시집 서두의 '시인의 말'과 시집 거의 끝부분에 자리한

 <내안의 타클라마칸>에서 적당한 답을 찾았다. 

 

겨울엔 여름이 그립고
여름엔 겨울이 그립다
내 안의 사계는 따로 돈다
그들을 따라가느라
내 언어의 발끝은 부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안다
눈부신 절정은 지금부터라고
꽃이 지고부터라고

-'시인의 말'. 전문 

 

 

...모래는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첫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되는 타클라마칸에서
길을 찾는 건 끝끝내 헛수고다

-[내 안의 타클라마칸] 부분 발췌

 

 

 

 

권기만

2012년 [시산맥]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발 달린 벌]을 썼다.

-출처: 알라딘 북스

 

 

 

https://www.youtube.com/watch?v=IwOfCgkyEj0

Like a Rolling Stone - Bob Dy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