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 부딪쳐도 슬퍼할 수 없다는 거.
치미는 욕설조차 없다는 거.
...
오랫동안 무직이었다.
오랫동안 인력이라는 단어를 연구했다.
인력사무소에 담 걸린 근육처럼 뻣뻣하게 새겨진 인력,
싫다고 해도 자꾸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인력.
달과 지구도 노동을 하고 있는 거다.
그렇다면 누가 고용주인가?
....
날을 꼬박 새우고 창밖을 본다, 어깨 부딪치며 출근하는 사람들.
인력이다.
나는 무력시위 중이다.
-[인력] 부분 발췌

10월에 읽은 시집은 백상웅 시인의 <거인을 보았다>.
창비시선 352번째 시집, 2012년 11월 초판 1쇄본이었다.
시인의 출판된 책은 이 시집이 유일했다. 이 정도의 역량이면 그간 한두 권은 더 썼을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저자의 근황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예상 밖의 기사를 보게 되었다. 창작모임에서 만난 후배에게 벌인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작가는 성폭력 교육을 수료했고, 절필로 죗값을 치루겠다고 말했다는 기사였다. 2016년 10월 자 국민일보 인터넷 기사였으니 그로부터 어언 10년이 된 것 같다. 그 뒤로 약속이 지켜진 모양인지 작가의 다른 소식이나 출판 계획은 찾을 수 없었다. <거인을 보았다>도 품절 상태였다. 절필로 죗값이 치러질 수 있는지 모르겠고, 어떤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자세한 내막도 알 수 없다. 신인상을 받았던 젊은 작가는 높아진 여권의 위상과 시대의 흐름이었던 미투 사건의 역사 속에 사라졌다. 사건을 알지 못했다면 이 시집에 더 애정을 품었을 수도 있었겠다. 작가에 대한 실체를 모른 채 환상을 품는 것이 독서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
사랑하는 사람을 지금 당장 열렬히 사랑하는 일과
떠나보내는 일.
확률은 반반입니다.
저는 예전에 이름의 획수로 사랑을 점쳤습니다.
이번 생이 조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무작위의 숫자 체계가
미덥지가 않습니다.
사랑을 복권하기 위해서는.....
그래요, 저에게는 숫자들이 필요합니다.
-[숫자들] 부분 발췌
진실로 그에게는 이번 생이 조작이었으면 좋겠다고 느꼈을 것 같다. 잭 니콜슨의 <As Good As It Gets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로맨스 소설 작가인 주인공에 대한 환상을 가진 애독자들이 실제 외모도 별로고 성격도 극악한 작가를 보고 경악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작가나 예술가의 본모습을 보게 되면, 환상이 깨지기 십상이다. 신비주의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그저 평범했더라면. 그대로 작가와의 거리를 두고 작품만으로 평가하는 상태을 유지해 줄 수 있었더라면. 실수였는 지 의도였는 지 모르지만. 돌이킬 수도, 지지할 수도 없게 된 그의 과오로 인한 현 상황에 아쉬움을 뱉는다.
선입견 없이 시집을 읽었을 당시, 글자의 총량에 압박을 느꼈다. 일반적인 시집보다는 두 배는 많아 보였다. 이번 달은 이 책 읽다가 지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많은 단어와 문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더더기라 쳐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수필마냥 개인사에 얽힌 이야기들을 적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그 어느 중간의 나이. 그간의 경험한 인생을 두런두런 읊조렸고, 난 귀기울였다. 어떤 사람은 흥얼거리면 노래가 되고, 선을 그으면 그림이 된다더니, 일기처럼 남긴 일상의 흔적이 모두 시로 변모한 것 같았다.
훗날 이 시집이 어떤 재평가를 받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출판된 지 십여 년이 지났다. 시인이 오랜 자숙 끝에 돌아와 집필을 이어갈 수도 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정도로 시대를 선도할 만한 획기적이거나 압도적인 상상력을 품은 작품은 아니라서 이대로 묻힐 공산도 크다. 재능있는 많은 작가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사라진다. 기억되었다가 흐려지는 기억마저 감사할 만큼, 존재 자체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덮고 지나쳐 가기에는 몇 편의 시들이 눈에 밟힌다.
장롱 속을 뒤적이다가 손에 잡힌 필름통,
어느 시간대에서 튀어나왔을까.
옛날이야기는 대개 통속적이고 해피엔딩인데,
나는 안다.
24장의 옛날은 적어도 지금보다 그리울 거다.
지난 계절의 지층을 하나씩 들춰낸다.
오직 순간으로 기억되는 화석들을 끄집어낸다.
이 컷의 하늘과 저 컷의 하늘들.
어렴풋한 이 컷의 눈물과 저 컷의 눈물들.
거기서 나는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언제나 웃는다.
명암과 채도가 달라도 살아남는 자만이 살아남는 자.
나도 내 안에 뭐가 말려 있는지 모르겠다.
-[통속의 개인사] 전문
가장 애독하고 싶은 시를 뽑으라면 <통속의 개인사>다. 적어두고 자주 읽을 것 같다. 흠잡을 데 없이 잘 쓰기도 했고, 모두의 이야기 같은, 스토리텔링에 매료되었다. 반면, 한번 읽어도 충분한 <그저 그런>이란 시도 있다. 평범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상황이 그려진다. 애착이 든다. 힘든 시절 즐겨 듣던 서울전자음악단의 <서로 다른>이란 노래가 함께 떠오른다. 눈물이 글썽거릴 것도 없고, 울컥하지도 않는데, 오랫동안 뭉클하다. 나의 얘기같다.
가방이 뜯어졌다.
속에 든 모든 게 쏟아졌다.
언제 집어넣었는지도 잊은 영수증, 책, 동전, 너무나도 익숙한 흔들림이나 덜컹거림까지도 쏟아졌다.
게을러서 여태 내가 기대고 살았다.
장대비에 젖고 눈발에 얼고 한 날은 햇볕도 쬐고 하면서,
가방은 울상이었다가 펴지기도 하면서.
연애도 하고 이별도 했다.
이력서도 쓰고 면접에서 떨어져도 봤다.
인조가죽이라 망조가 오래전부터 보였다.
짐승이 되려다가 만 가방, 짖다가 그만둔 가방, 소처럼 여우처럼 악어처럼 고래처럼
착하지도 나쁘지도 못하는 가방.
가방이 제 밑바닥으로 입을 벌렸다.
찢어지면서 이빨의 형상까지 만들었다.
이제 이 가방의 시대는 끝났다.
- [그저 그런] 전문

백상웅
1980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났고,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과 2008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거인을 보았다>가 있다.
작가 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https://www.youtube.com/watch?v=XEmlHjjVt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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