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냄비 받침이 될
시를 쓰고 모은다
누군가의 라면 냄비를 받치고 있다가
불현듯
또 누군가에게
뜨겁게 읽힐 수 있다면
-[뜨겁게 5 - 냄비 받침의 시] 전문

11월에 읽은 시는 이현정 시인의 <지구를 돌리며 왔다>이다.
출판사 여우난골의 시인수첩 시인선 93번째편, 2025년 2월 초판 1쇄본이었다. 작가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보니 2쇄가 나왔다고 한다. 출판 업계의 오랜 불황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시집도 자주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한글 노랫말이나 단어들의 쓰임이 사라지고 있는 요즘, 시에서라도 단어와 표현의 쓰임이 오랫도록 빛나기를 바란다.
서문에 적힌 시인의 말이 눈에 들어왔다. 이 보다 더 멋진 오프닝을 몇 개나 찾아볼 수 있을까.
고운 체로 가득 쳐서
결국 남은 낱말과
덜어내고 덜어내어
끝내 지킨 문장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놓지 못해
글이 된
마음
어떻게 보니 근래에 읽은 책 중 가장 최신간이다. 젊은 여성 시인의 신간은 가슴을 뛰게 한다. 트렌드를 이해하지 못할까 싶어 겁이 나기도 했다. 읽다보니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시는 시조가 근간이었다. 가슴을 울린다. 시조가 일본의 하이쿠만큼 유명해지길 바랬던 적이 있었는데 명맥을 잇는 시를 보니 감정이 흔들렸다. 본연의 형태를 간직한 채 현대시처럼 쓰인 걸 보니, 팔이 안으로 굽었다. 글이 더욱 이뻐 보였다.
아무도 몰랐을 때 허수였던 미지수
누군가 보았을 때 또렷한 실수가 되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상수가 된다
-[우주가 되는 공식] 중 1 수
어렸을 적 처음 다녔던 논현 초등학교는 시조와 창을 가르치던 학교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특목학교라 부를 수도 있었겠다. 교장선생님의 의지로 몰아붙친 학교 정책은 매일 아침 전교생이 시조를 읊고 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매달 시조 시험도 있었고, 창작 시조 대회와 시조창 대회도 행했다. 그 외에 탈춤과 장구도 배웠던 것을 생각하면 교장 선생님이 정말 우리 문화 가르침에 진심이셨던 분인 것 같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보니, 이 배움이 큰 자산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외우고 공부했던 시조로 인해 국어 공부가 순조로웠다. 힘들 때면 살면서 어렸을 적 암기했던 시조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것이 또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었다. 예전에 고전이나 위인전을 읽다보면 주인공이 성경 구절이나, 명언, 시 등을 평소에 외우고 쓰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보여주기 위한 허세로 보였는데, 성장해서 보니 아니었다. 그것들이 삶의 좌우명처럼 자신을 버티게 해주었다. 어렸을 적 암기 교육이 그래서 중요한 것 같다. 지금은 무엇 하나 외우려고 하면 시인의 이름 조차 기억하기 버겁다.
한글을 만든 이는 일찍이 알았을까
덧입히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는 걸
혹시나 영영 못 볼까 못 보면 곧 잊을까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 태어날지언정
지우지 못하는 원본이 있다는 걸
절대로 놓지 못하는 파일명이 있다는 걸
-[다른 이름으로 저장] 전문
* 한글의 '한' 글자는 고어체로 쓰였는데 브라우저 상에선 입력을 어떻게 하는 지 방법을 모르겠다...
저 수많은 별은 곧
하나의 사람이라서
빈 땅으로 돌아올 때
보는 이마다 손 모은다
소원을 들어주는 건
여태
사랑하기 때문
- [유성우] 전문

그녀의 시들이 전부 시조 형식은 아니지만 그 외의 시들도 8~90년대 보아오던 익숙한 형태라 낯설지 않았다. 무언가 다양한 형식을 보여줄 수 있다고 실력을 표현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문체는 새롭지 않았으나 익숙함에 매료되었다. 시에 관해선 보수적인 편이라 오히려 좋았다. 그 어떤 깊은 뜻을 찾아내려 애쓰지 않아도 좋았다. 삶의 무게보다 대화에 마음을 두었다. 그리고 듣고만 있는데 내가 말하는 것 같은 최면상태에 빠진다. 이런 것이 교감이겠지? 가장 적어두고픈 시를 고르라면 청춘일 때 썼을 것 같은 <사랑은 귀찮고 사랑 시나 쓴다>. 뻔하고 뻔뻔한 자태지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순간 눈에 맞는 시. 이런 시가 너무 좋다.
술이 단 밤
술이 쓴 밤
술이 고픈 밤
술이 취한 밤
모르는 골목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사랑은 내내 귀찮고
사랑 시나 쓴다
그리운 누군가 보고픈 무언가
놓지 못한 어떤 이가 있느냐는 물음에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냉정과 열정의
어디 즈음 좌표를 찍고
손뜨거워 못 건넨 편지
안주 삼아 떠올리며
사랑은 줄곧 겁이 나
사랑시나 써 본다
-[사랑은 귀찮고 사랑시나 쓴다] 전문
사랑은 귀찮고...를 읽으며 어울리는 곡으로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을 골랐다. 이 곡을 커버했던 로제의 음색이 블렌딩이 좀 더 좋았다. 틀어놓고 한번 더 읽어본다. 벌써 11월이 다 지나가는 구나. 슬프다.

이현정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 201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2024년 서울문화재단 첫 책 발간 지원 사업에 선정되었다.
https://www.facebook.com/duetwings
https://www.instagram.com/hyunjunglee314
수상 : 201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저자 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https://www.youtube.com/watch?v=WmvZFkaft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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