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화문에서 내렸고
서대문까지 걸었다
이렇게 문들 사이로 걸어도
성의 윤곽은 알 수 없는 일
한 언어를 터득하기 위해
사람들이 살다가 죽을까
당신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
목구멍에 침묵을 걸었는데
그런 건 위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
- [서울, 또는 잠시] 발췌
올해 1월은 김이강 시인의 데뷔 후 첫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를 골랐다. 문학동네 시인선 스물여섯번째, 2013년 1판 2쇄본이었다.

바람 부는 날에 알게 되었다
슬픔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걸이에 대하여
고요한 소용돌이에 대하여
줄을 풀고 떠나가는
때 이른 조난신호에 대하여
삐걱삐걱 날아가는 기러기들에 대하여
아마도 만날 것 같은
기분뿐인 기분
아마도 바위 같은
예감뿐인 예감
어디선가 투하되고 있는 이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구부려도 펴도 나아지지 않는.
- [바람 부는 날에 우리는] 전문
1982년 여수에서 태어나 바다를 보며 자랐다는 김이강의 시집을 고른 건 책 제목이 매우 도발적이서다. 성별 구분이 잘 안되는 이름이지만, 제목을 통해 시인이 여성일 거라 짐작했다. 젊은 여성에 어울리는 멋지고 자극적인 문구였다. 뭔가 통념이라던지 고정관념이라던 지, 그런 걸 비트는 여성상위 표현 같았다. 그것은 나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센 언니 같은 기분이랄까. 제목이 발췌된 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제목은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밤>이었다. 동요하는 머릿속 상상은 극에 달했다.
1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당신은 말한다 조용한 눈을 늘어뜨리며
당신은 가느다랗고 당신은 비틀려 있다
그럴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가만히, 당신은 서 있다 딱딱한 주머니 속으로
찬 손을 깊숙이 묻어둔 채 한동안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것이다
행인들에게 자꾸만 치일 것이고
아마도 누구일 지 모르는 한 사람이 되돌아오고
따뜻한 커피를 건넸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겨울이 갔던가
...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오늘 밤] 부분 발췌


아, 언니는 센 언니가 아니었다. 시에서 그 말을 한 사람은 상대였다. 그 성별은 불분명하나 좋은 분위기도 아니었다. 비틀려있는 당신. 당신의 대상이 남자라고 가정한다. 존대어를 쓰니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닐 수 있다. 이제 막 시작한 서먹한 연인일 수도 있다. 다만 사랑해서 또는 오늘 밤만을 위해서? 아니면 갈 곳이 없어서? 수많은 질문이 스쳐간다. 마음에 바람이 불고 진눈깨비가 내린다. 이런 상황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데.
이 상황극은 나를 과거로 회귀시켰다. 열세 살 쯤이었을까. 쌀쌀하던 늦가을 어느 저녁, 나는 잠실역을 빠져나오다가 마주 서 있던 젊은 남녀를 발견했다. 그들은 스쳐 가는 많은 사람 사이에 말없이 우두커니 마주 보고 있다가 키스를 했다. 아주 한참 동안. 사람들은 그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그 장면은 마치 영화 같았다. 그들 주변의 소음은 사라졌고, 상황은 홍콩영화의 슬로모션처럼 진행되었다. 슬퍼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상관하지 않았다. 여성은 정지상태였고, 남성이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닿은 상태였다. 그리고 둘은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보며 스쳐 갔다. 조심스레 뒤돌아보며 걷길 반복했다. 누군가의 엑스트라로 지나간 그 찰나의 순간이, 길어봤자 15초도 되지 않았을 그 시간의 편린이, 내 평생 기억에 남았다. 시대가 한참 지난 요즘은 그런 장면들이 흔할 수도 있겠다. 지금은 더 한 것도, 눈살을 찌푸릴, 외설스러운 장면들도 우습게 벌어질 수 있겠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장면은 진한 슬픔이었다. 그 장면이 이 시를 통해 다시 플레이되었다.


그는 멀리 떠나기 전, 그녀에게 묻는다. -오늘밤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그럴 수 없다고.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마주 보지만 웃지도 못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떠나지도 못한다. 그녀는 단호하다. 여기까지야. 힘든 것은 인제 그만. 하지만, 돌아서지도 못한 채 마주하고 있다. 무심히 시간만 흐른다. 그러다가 남자는 키스한다. 서로 이것이 작별 키스임을 직감한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선호하지 않는 이 겨울이 서둘러 지나가길 바라면서.
햇살이 접히던 오후였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네
산책은 바람을따라잡지 못하고
얼굴은 얼굴을 닮을 수 없었네
머리카락의 길이로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네
비가 오려고 하는 하늘을 보라고 속삭이네
내일은 비가 온다고
어제도 비가 온다고
...
[모두가 걸어가네] 부분 발췌
내용의 배경이나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지, 상상력만으로는 그 상황을 풀기가 힘겨운 시가 많다. 그래서 더 궁금했던 것일까.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내향적 성격이, 단호한 마음이,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으나 많은 생각의 열정이 짓누르는 그 복잡다단한 심정이, 하나하나 링크된다. 많은 헤어짐이 스쳐 간다. 이렇게 또 헤어지는구나. 먹먹한 당신. 다시 이별하고 헤어짐에 담담해지려는. 덤덤히 이겨내는 그 무던함의 가장이 아팠다.
시집을 을 다 읽고도 미련이 참 많이 남아 놓기를 주저했다. 한 달 동안 사랑했던 시집. 함께 해서 좋았다.
일월에, 한 번도 마음먹지 않았던 어떤 대륙으로 떠날 것이라고
당신은 말한다 그곳에서 당신 머리 위로 한 뼘씩은 떨어진 키를 가진 사람들이
아무런 무기라도 허리춤에 차고 다닐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극지방으로부터
사십 도만큼 추워져서 나타났던 것처럼
당신은 다시 어떤 간극을 짊어지고 떠나는 것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의 온도와 시간은 그런 것이라고
....
-[검은 구름은 모두가 검은 구름이다] 부분 발췌
김이강
1982년 여수에서 태어났다. 2006년 겨울 시와 세계로 등단했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6년 『시와세계』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타이피스트』 『트램을 타고』.
-저자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와 시집 뒷면에서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 문학동네 시인선 26 | 김이강 | 알라딘US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 | 문학동네 시인선 26 | 김이강
문학동네 시인선 26권. 2006년 데뷔 이후, 동시대 젊은 시인들과 한국 시단의 새로운 지형도를 그리며 주목을 받아온 김이강의 첫 시집. 1부 빌린 책은 다음에 줄게요, 2부 신발이 필요해, 3부 오늘
www.aladin.co.kr
김이강의 시집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에 어울리는 노래, W의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를 듣다. 시인의 목소리인양 듣고 또 듣게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RHw9NTrLu5A&list=RDRHw9NTrLu5A&start_ra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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