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모래언덕에 스치운다
나그네 하나
그곳에 닿기 전에
생을 마친다
-[이월] 전문
2026년 2월에는 류시화의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를 읽었다. 푸른숲에서 출판된 1991년 9월 초판 19쇄본이었다.

시를 쓴다는 것이
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
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였다
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
내 가슴에 피를 묻히고 날아간
새에 대해
나는 꿈꾸어선 안 될 것들을 꿈꾸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다시는 묻지 말자
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
고개를 꺽고 뒤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전문
한국 시집 출판계에서 몇 안 되는 베스트 스테디셀러 중에 하나인 류시화의 시집을 다시 읽었다. 어릴 적 선물로 받은 시집이다. 그전까지 잘 팔리던 시집은 윤동주, 도종환, 서정윤 정도가 기억되는데, 류시화의 시집 인기는 명상철학서의 붐과 더불어 광풍같이 몰아쳤다. 90년대 전반에 걸쳐 거의 십 년간 베스트셀러 자리에 있었던 슈퍼 울트라 스테디셀러였다. 2012년 이후 데이터를 보관하기 시작한 이후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시집 리스트의 1위는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라고 한다. 2012년 이전 기록이 없는 관계로 류시화의 [그대가 곁에 있어도..] 시집은 리스트에 등장하지 않는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모를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전을 포함한다면 아마도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시집 다섯 손가락 안은 당당히 들어가지 않을까.
그전까지는 주로 사랑에 관한 시나 교과서에 등장했던 민족주의 시만 접했었다. 그러다가 만난 내면을 바라보는 명상시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철학자와 구도자. 끊임없이 삶과 진리에 대한 탐구. 잠언처럼 박힌 문구에, 이것이 진정한 시의 품격인가 싶었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
-[길 위에서의 생각] 부분 발췌
그 뒤로도 류시화는 여러 명상 시집과 잠언 시집을 출판했다. 그의 자작시집도 있었고, 인도나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잠언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의 글에 매료되었다. 어떻게 보면 시에 빠졌던 것이 아닌 구도자의 물음에 흔들렸던 것 같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가져보지 못했던 것처럼. 그의 시나 추천 시들을 읽으면 나 역시 깨달음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키타로의 음악이 들렸고, 우화 속을 거닐었고, 갠지스강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접촉이 별로 없는 인디언 부족과 교류하며 추장의 지혜를 듣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러다가 한동안 멀어졌다. 삶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품고 살기엔 사는 것이 너무 빡빡했다. 인생의 배움보다 삶의 비용 청구서 처리에 목매달고 살았다. 통장에 스쳐 가는 급여가 슬펐고, 줄어들지 않은 카드 빚에 치여 있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그렇게 나이를 먹었다.


학창 시절 읊고 살았던 류시화의 시를 다시 읽었다. 한없이 낡아버린 그의 책. 담겨 있는 그의 글이 예전처럼 완전한 구도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떤 시들은 불완전 연소 같았다. 그럼에도 흔들렸다. 잔잔한 호수에 조약돌이 만든 파문. 살짝 일렁이는 물결에 닿아 동요해 버린. 그의 시의 본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 역시 그대로였다.
...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 [새와 나무] 부분 발췌

류시화
시인 류시화는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문과 재학 중인 198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을 냈으며,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마음챙김의 시』를 엮었다. 인도 여행기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지구별 여행자』를 썼으며, 하이쿠 모음집 『한 줄도 너무 길다』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 『바쇼 하이쿠 선집』과 인디언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엮었다.
-저자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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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시화
류시화 시인이 등단하고 10년이 지나서 낸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와 5년 뒤에 펴낸 두 번째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다시 15년이 흐른 뒤에 출간한 제3시집 <나
www.aladin.co.kr
이 시집과 어울리는 곡으로 혁오의 Tomboy 톰보이를 선택했다. 세월이 흘러도 나는 여전히 젊은 것 같고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간다.
https://www.youtube.com/watch?v=pC6tPEaAiYU&list=RDpC6tPEaAiYU&start_radi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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