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Hrs to 2 Wks - (P)oetry 시

P020.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 - 오두섭

TMLove 2026. 3. 2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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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쳐두고 구덩이 하나 파놓는다
어딘가 내 길이 끝나는 곳
내 삶을 모두 묻어버리고도 휑하니 비워 있을

구멍 난 저 허공에서
울음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을지라도

-[허공을 팠다] 부분 발췌

 

 

 

올해부터는 가능한 한 매월 두 권의 시집을 읽어 보기로 했다. 원래의 취지는 매달 한 권의 시집을 붙잡고 읽고 또 읽으며 되새기겠다는 것이었는데, 좀 변질되었다. 읽기도 하겠지만, 많이 쓰려고 해서 약간 방향성을 틀었다. 그래서 3월에 한 권 더, 시인동네 시인선 150번째, 오두섭 시인의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을 읽었다. 2021년 초판 1쇄본이었다. 제목을 읽고 들은 첫 선입견은 '요즘 MZ 세대들'은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었다. 긴 제목도, 내용도 참 MZ스럽다고. 이 깜찍하고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제목을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하고 찬탄했다. 이런 웬걸… 1936년생이셨다… 197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셨다. OMG.....도대체 연세와 경력이..... 올해 나이 90세이신 건가? 고은, 신경림, 황동규 시인들과 비슷한 연세였다. 찾아보니 작년 2025년에 신작 세 번째 시집 [옆구리의 슬픔]이 발간되었다. 말줄임표의 난발로 나의 경악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겁니까? 

 

내 뜨거운 눈물일지라도 알레르기일지라도 내 몸은 좁은 관을 매달고 뚝뚝 떨어지는 이 정체 모를 수액을 샅샅이 받아낼 심산이다. 나는 슬픔의 부족들이 종신형을 살고 있다는 마을로 숨어들 것이다. ...

-[제목을 붙일 수 없는] 부분 발췌

 

 

거의 한 세기를 살면서 단 세 권의 시집만을 발표한 시인. 오랜 세월을 꾹꾹 눌러 빚은 결과물을 존경을 담아 경건하게 읽었다. 아, 그러나 대부분의 시들이 난해했다. 어떤 시들은 마치 불협 코드 진행으로 머릿속을 혼란에 빠뜨린다.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요. 전 무슨 소리인지 파악이 잘 안 돼요!

예시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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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공연을 환불한 프리마돈나 Q는 백신을 거부 중이며 환각 여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주에서 수십 광년 날아와 눈송이로 침투하는 미확인 우주요정 (UFE)의 소행임이 밝혀졌는데요.
삼류 시인을 비롯해 화가 만화가 단역배우 SF 작가 게이머 등등 
각기 다른 증세를 보이는 것 또한 미스터리한데요...

- [눈 내리는 감염 주의보] 부분 발췌

 

먼저 성호라도 그어 볼 것
아직은 정체가 파악되지 않은 물체 하나 당신의 눈높이에 떠올랐다면
(UFO출현을 검색하는 순간처럼)
나의 우주선이 부디 잘 날아가기를 빌 것
포장지 속에서 열쇠 하나 발견했다면
성급하게 끼우려 하지 말 것
(본성으로 접근하고 감성으로 도전할 것)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어떤 설명서 하나 없이
이곳에 (출시되어) 나왔으니
스스로 숨쉬기를 배우고
미로 앞에서 멈칫하는 법을 알았으니
...

-[사용설명서의 사용설명서] 부분 발췌

 

순항 중이던 우주선이 갑자기 역추진 브레이크를 밟는다. 좌전방에 낯익은 우주선 하나가 감지됐기 때문. 두 우주선 간에 긴장의 진공벨트가 구축되고, 선장은 상대의 지위 및 성향의 변화, 친분등급, 재산목록과 거래내역을 비롯해 우주계의 평판, 건강상태, 스캔들 유무 등의 신분 분석 자료를 출력했다... 

-[길 위의 두 사람] 부분 발췌

 

...
계약자1: 소멸의 증발 끝에 서서히 환생하는
불사의 생명 결정체, 단, 태양과 바다는 제 3자로 간주
계약자2: 지구상의 웬만한 동식물은 먹어치우는
포식자, 단 물은 선별적으로 마심 
...
- [눈물이 싱거워질 때까지] 부분 발췌

 

 

이해도 잘 되지 않거니와 정말 생각지도 못한 SF와 과학 관련 어휘들이 쏟아져 나온다. 왜? 이런 단어들이 시와 어울리고 있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야말로 편협한 생각이었던 것이라고 반문당한다. 혹시 1937년에 사망한 이상 시인을 잇는 초현실주의 시의 계보를 잇는 것일까라고 자문했다. 난 대체로 읽다가 어려우면 '난해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나의 무지가 빚어낸 난항의 결과물일 수 있고, 깊이와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난처한 상황일 수 있다.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 이 시집도 여지없이 난색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나 같은 독자의 안색을 살핀 듯, 시인은 배려와 타협으로 숨고를 타이밍에 적절한 이지 리스닝 시들을 배분해 놓으셨다. 

 


내게서 멀리 있는 계절에 머물러 주는 당신이 고맙던 시절이 있었다


일기장 속에 아직도 까슬하게 살아있는 당신의 테두리

저문 밤 부칠 데 없는 이름 몇 개 달빛에 실어 날려보낸다

너의 길목을 서성거리며 긁적인 문장들이 오늘에야 되돌아 오는데

이토록 선명하게 찍혀 씻기지 않는 지문처럼 당황스럽던

젊은 날 소인(消印)이여

-[우표] 전문

 

 

 

 당신의 머릿속에 추출한 개인적인 경험들이 쌓여 써내려간 사소한 목록을 내 짧은 삶에 얼마나 만날 수 있었을까, 반세기는 더 살아야 당신의 전반적인 목록들이 눈에 투영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목록에서 가슴이 욱씬거려 발을 멈춘다. 의문투성이의 밤하늘 별자리처럼, 바라만 보아도 별에 닿는 기분이다. 별자리와 궤도와 거리를 알지 못해도 좋다. 어떤 별은 바라보는 것으로도 행복하게 한다.

 

...
너의 아름다움은 내가 사랑하는 쓸쓸함과 짝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

사랑은 매번 등을 돌리려 하는데 우리는 그 나쁜 버릇을 고칠 의향이 없다

내가 포옹을 풀고 이별의 몸짓으로 뒷걸음칠 즈음 너는 그 자리에
덩그마니 서서 추억의 뒷덜미를 마주해야 하리

나는 오늘도 왼팔을 한껏 뒤로 꺾으며 어째서 여태 한 번도
내 등짝을 쓰다듬어 주지 못했을까 자책한다

-[뒷모습] 부분 발췌

 

 

그리고 [뒷모습]의 마지막 시구가 마음에 닿았다. '어째서 여태 한 번도 내 등짝을 쓰다듬어 주지 못했을까 자책한다'라는 역설적인 부분이. 사람은 팔을 뒤로 꺾을 수 없다. 적당한 팔 길이로 인해 스스로를 안아 주거나 쓰다듬어 줄 수 없다. 오직 다른 이를 통해, 타인의 체온을 통해서만 해 주거나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화자는 그렇게 하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스스로라도 위로해 주고 싶다. 하지만 어떤 행위는 스스로는 할 수 없어서 쓸쓸함을 사랑하게 된다. 안길 곳이 없는 우리는 너무 외롭다. 

 

 

-오두섭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1979년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소낙비 테러리스트』,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을 냈다.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원이다.

-저자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9650475

 

내 머릿속에서 추출한 사소한 목록들 | 시인동네 시인선 150 | 오두섭

시인동네 시인선 150권. 1979년 《매일신문》으로 등단한 오두섭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원인불명의 세계 앞에 던져진 오두섭 시인의 실존적 자아는 그만의 방법으로 존재론적 성찰을 거듭하였고,

www.aladin.co.kr

 

이 시집과 어울리는 곡으로 David Bowie 데이비드 보위의 Space Oddity를 골랐다. 이 음악은 내 인생 영화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의 OST로도 쓰였다. 오두섭 시인의 시는 우주비행사의 교신을 다룬, 다소 난해하지만 울림을 주는 여정을 닮았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꾸준히 걷고, 방황하고 좌절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는 Walter의 모습도 닮았다. 노래와 영화 중 무엇이 먼저 떠올랐는지, 아니면 동시에 떠올랐는지 잘 모르겠지만, 둘 다 무척 어울렸다. 외로움과 쓸쓸함의 연결점들이 다가왔다. 

 

https://www.youtube.com/watch?v=L-7EROynApU&list=PL_6TKNVc8URTGlGZktSiMm8CcQppQh11s&index=6

나이트 비전이란 유투버가 만든 영상인데, 영화사에서 만든 OST 영상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너무 잘 만들어서 영화가 생각날 때마다 자주 플레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