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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2.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권대웅

TMLove 2026. 5. 1. 12:01

 

... 외로움이 포화 상태에 달하면
터져 죽어버리는 열대어 블랙몰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끈끈이주걱 속을 헤맸다
불러도 대답 없는 적막
메아리조차 없는 사랑이라는 이름
침묵이 두려워 자꾸 울어야 했다
돌아갈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던 정거장
어깨에 목에 팔뚝에 망집을 짊어지고
비를 맞으며 한 사내가 오래 서 있었다

-[장마 1] 부분 발췌

 

 

2026년 4월에 권대웅 시인의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를 읽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97번째로, 2019년 6월 출간된 1판 5쇄본이었다.

 

 

 

시집의 머릿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4년 만에 내는 시집인데 140년처럼 먼 것 같다. 
140년 전에 나는 어느 여름을 살았고
140년 후에는 또 어느 시냇물이나 구름,
혹은 바람 같은 것으로 흐르고 있을까.

 

돈을 주고도 배울 수 없을 것 같은 감성. 시인의 감성에 취했다. 그의 사색을 공유받고 싶었다. 마치 140년을 갈고닦인 시들이 다가와 나를 사색의 공간에 몰입시켜 주기를 바랐다. 이 시집을 선택한 이유였다.

 

시집은 총 4부로 나뉘어져 있다. 계절로 나눈 느낌이었다. 1부 - 당신과 내가 살다간 방 -은 짧은 사계절이 봄으로 시작되어 겨울로 마무리 되는 느낌이었고, 2부 - 세상의 봄은 얼마나 왔다 갔을까 -는 봄, 3부 - 어찌 안아플 수가 있니 -는 여름, 그리고 4부 - 이 세상에 나는 착불로 왔다 - 는 다시 가을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계절과 자연의 풍경이 어울리는 시집이었다. 

 

...
지렁이는 흙속에서 얼마나 꿈뜰거렸으면
껍질이 다 벗겨진 것일까
엉겅퀴는 얼마나 많은 가시밭길을 걸었기에
꽃 입술에 가시가 박혀 있을까
간절하게 갈망하고 갈구하고 열망하는
저 생의 오체투지를
나는 얼마나 이 세상 바닥을 기고 기어야
비로소 투명해질 수 있을까

-[포복] 부분 발췌

 

 

권대웅의 시는 회한이 가득하다. 억장이 무너진  많은 세월을 견뎌 왔나 보다. 그도 나와 같은 'I' 성향인가 보다. 지난날을 소회하며 얼마나 곱씹고 아파했을까. 잊었다고 생각하면, 또 불현듯 찾아오는 상념. 잦은 실수가 많았던 생. 돌이키고 싶었던 일들이 너무 많았던, 생의 오체투지를 이불 속에서도 머릿속에서도 셀 수 없이 행했던, 얼마나 서툴기만 한 삶이었던가. 생과 함께한 시간을 아련하게, 아름답게 더듬어 보게 한다.  

 

권대웅의 시는 그림이 그려진다. 마치 편지를 쓰는 것과 같다. 날씨와 계절을 얘기하고 풍경과 장소를 말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자신의 일상을 툭 던진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계절이 느껴지고, 꽃들과 나무들을 통해 자연의 냄새와 색채에 감싸인다. 피톤치드가 가득한 장소에 이미 들어서 있다. 그래서 삶의 고단함에 힘들어하면서도 아픔이 덜하다. 치유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 

 

계절에도 늑골이 있다
여름에서 가을로
햇빛이 자리를 바꿀 때마다
가려졌던 젖은 기억들이 드러나
부끄러울 때가 있다
따가울 때가 있다
모두가 그것을 감추고 살지만
봄이 목이 메도록 짙은 철쭉을 데려오고
여름이 훌쩍 해바라기를 데려가듯이
떠나간 것들이 다시 오고
다시 온 그 무엇 때문에
못 견디게 외로울 때가 있다
지나가는 바람에 묻어 있는 냄새에
오래 비어 있는 적산가옥 같은 것
저녁의 뒤란 같은 
마당에 가뭇가뭇 꺼져가는 짚불 같은 것
그것에서 살았던, 사랑했던 기억이
잠깐 떠오르려다가
후다닥 먼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

-[이유도 없이 못 견디게 그리운 저녁] 부분 발췌

 


요즘 세상에 가장 어울리는 책은 시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은 길어졌는데, 그에 반비례하게 모든 것이 짧아지고 있다. 책도, 영화도, 노래도 짧아진다. 통화도, 문자도, 심지어 인간의 관계와 사랑의 감정도. 초단위로 닳아버린 우리의 조급함. 짧은 시가, 얇은 시집이 비집고 들어와 짜투리 시간을 채워줄 수 있다면. 위로를 안겨줄 처방전이 된다. 울리기도 하고, 위로를 다하는. 공허한 날이 늘어가는 요즘이면 더욱 가까이하고 싶은 시집. 마음이 가난해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이 돌아오는 것이리라. 

 

 

 

 

...
그 시간이 되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울음
혼자서만 너무 그리워했던 눈빛
억장이 무너져 쌓인 적막
꽃들의 그림자와 떠나지 못한 햇빛들
이쪽으로 올 수도 없고
저쪽으로 가지도 않으며
현재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서성이는 응어리
그 시간의 갈피에 숨어 살고 있는 것들
...

-[시간의 갈피] 부분 발췌

 

 

 

 

 

...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다시 이름 붙이고 싶을 때가 있다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부분 발췌

 

 

 

나를 닮은 시집을 만난 4월이었다. 

 

 

권대웅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당나귀의 꿈》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산문집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등이 있다.

-작가 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6343573&start=pcsearch_auto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문학동네 시인선 97 | 권대웅

문학동네시인선 97권. 권대웅 시집.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권대웅 시인이 14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시집이다. 해설을 맡은 김경수 평론가는 이번 시집을 미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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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과 어울리는 곡으로 권진아의 '진심이었던 사람만 바보가 돼'를 선곡했다. 왠지 모르게 이 사랑 노래가, 그녀의 음색이, 시집의 아련함을 닮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APYhSUUday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