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착이 사랑이 아니라면 난 한번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 -55p
배심원을 서라는 메일이 왔다. 일전에 한번 미뤄서 다시 미룰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누가 백신을 맞았는지 안맞았는지도 모르는 요즘. 인종혐오 범죄가 폭등하는 지금. 어떻게 사람들이 잔뜩 모인 법원에 호출시킬 수 있는 거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몇시간이 될지 며칠이 될 지 모를 긴 시간을 대비해 책 한권을 챙겨 넣었다. 안내방송을 듣느라 장시간 집중하기 어려울 텐데 달달한 연애소설이나 읽으면서 지루함을 견뎌보자고.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첫눈에 표지 디자인에 반한 책이다. 요즘 다시 유행하는 시티팝 음악이 연상되는 분위기에, 대도시의 고독함 속에 핑크 빛 사랑 한 점 찍은 것 같은 그림이었다. 좋아하는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이 떠올라서, 주저없이 골랐다. 젊은 작가의 짧은 출판 인터뷰 영상과 책 표지와 책날개에 씌여진 이력과 추천사를 훓어보긴 했다. 그렇게 가방안에 넣어두었던 책을, 수백명이 앉아있음에도 고요하던 배심원 대기실에서 꺼내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대도시의 사랑법>은 연애소설이었다. 그리고 예상과 다르게, 읽으면서 반신반의하게 되었다. 초반의 몇문장들을 되풀이해서 읽어 보았다. 내가 지금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를. 기대했던 색채가 핑크 빛이 아니고 퍼플 빛이었으니까. 말로만 듣던 퀴어 문학이었다. 백신 주사를 맞았던 어깨 부위에 통증이 재발하는 것 같았다. 한국이 이 정도로 개방되었을 줄 몰랐다. 내가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다. 불편함 없이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가방 안엔 다른 대안도 없다. 인터뷰에 아무것도 발설하지 하지 않은 출판사와 작가를 원망하면서도, 또 그것이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니 차마 원망은 계속할 수가 없었다. 당황스럽네. 요즘처럼 성 다양성에 대한 인식변화속에 나만 과민반응인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것이 불온서적이나 금서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맞물려 골치 아파진 상태로 책을 끝까지 읽기로 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주고받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90p
자전소설처럼 보여지는 <대도시의 사랑법>은 4편의 단편으로 엮인 연작소설이다. 대학시절 만나 동거를 하던 주인공 ‘나’의 여사친, 재희의 결혼식에 그가 초대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매일 술에 절어 다른 남자를 만나며 자유롭게 살던 재희와 마찬가지로 매번 다른 남자를 만나며 자유롭게 살던 주인공 ‘나’는 사회의 통념으로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동거를 시작했었다. 절대 결혼은 안할 것 같았던 그녀였는데, 결혼을 한다고 했고 ‘나’에게 축가를 부탁했다. 재희와 함께한 시절을 추억하며, 결혼식 내내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사랑이었을 지 모를 지난 감정을 돌아본다.
암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다가 5년전 만나 사랑에 빠졌다가 헤어졌었던, 나이가 한참 많은 운동권 출신의 형을 떠올리며 쓴 ‘우럭 한점 우주의 맛’ 편이 이어진다. 진정한 사랑을 나누었으나 자신의 HIV감염으로 인해 결국 헤어져야 했던 규호와의 사랑과 이별을 다룬 ‘대도시의 사랑법’ 뒤엔, 규호와 헤어진 뒤, 그와 다녔던 방콕여행의 발자취를 짚어보며 그리워하는 ‘늦은 우기의 바캉스’편으로 이어지며 마무리를 짓는다. 스토리 마다 사랑의 대상이 등장하고, 이어 나갈 수 없었던 사랑에 아파한다. 보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는 것과는 좀 다른 상황이긴 하다. 애틋하게 사랑하고, 방황하며 난잡하게 만나고, 고독과 슬픔에 젖는 로맨스의 일반적인 스토리 라인을 밑바탕으로, 암투병, 불치병 (HIV), 운동권 배경의 사람 등의 단골소재를 얹고, 퀴어 코드가 얽히니 전혀 진부하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사랑의 상대가 이성이었다면, 나란 독자의 입장에서 좀 더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었을까를 상상했다. 철저한 삼자의 위치라는 벽을 치는 것이 아닌, 같이 사랑에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었을까하고. 다른 한편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고지식한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이 소설의 불편함을 해체하면, 결국 사랑이야기가 남는다. 바라보는 사랑의 방향이 다르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정할 수 없겠지…퀴어를 들어낸다면, 아니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충분히 유머러스하고, 슬프고, 아프고, 고단한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가 담겨있는 소설이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절망과 혼란스러움이 기억났다. 그보다 현재진행형에 가깝게 진화된, 퀴어의 색채를 띈 연애 성장 소설이라면 설명이 맞겠다. 여전히 어렵다. 사랑을 정의한다는 것. 사람과 사람을 잇는다는 것. 서로에게 닿는다는 것.
이제는 난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어
취업도 글쓰기도 연애도 무엇도 권태롭지 않은게 없고.
그런데도 나는 왜 이상하게, 자꾸만 네 이름을 쓰고 싶은 걸까
지독히 일상을 닮아 있는 또 다른 한명에 불과한 규호, 너의 이름을 말이야 -205p
박상영
스무 살 때부터 온갖 나라를 쏘다녔지만,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쓰고, 말하고, 남 웃겨주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며 살다가,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연작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믿음에 대하여》,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 에세이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를 썼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2023년 국제더블린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젊은작가상 대상, 허균문학작가상,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 작가 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June, 2021. Published @ Touchstory Lab.
-2025년에 덧붙이는 글-
팬데믹이 발생한 지 5년이 지났고 책을 읽은 지 어언 4년을 넘겼다.
혼란했던 시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
시간은 정말 빨리 지나갔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던 아시안 혐오와 범죄들은 예전보다 줄어든 것 같다.
팬데믹 당시 비어버린 상가들은 아직 채워지지 않고 있다.
음식점이나 술집들도 많이 줄었다.
거리의 인파는 한산해졌지만, 퇴근길 도로는 여전히 지옥이다.
마스크를 벗고 다니지만, 마스크를 써도 눈총을 받지 않게 되었다.
겨울이 돌아오면 코비드 주의보가 발생되고 예방접종을 권유한다.
감기처럼 인식되어 버려 우리 삶의 한부분이 되었다.
성 정체성에 관한 질문은 여전히 다루기 어려운 이슈로 진행되고 있고
그 기간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소설은 영화화되고 드라마화 되었다.
작가는 그동안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 에세이《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등을 집필했다.
그리고 난 그 기간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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