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배명훈 저. 출판사 문예 중앙. 256페이지 번뜻한 양장본. 그런데 사이언스 픽션.
일반적인 독서가들이 경험하게 되는 사이언스픽션 세계와의 조우를 보면, 유년기에 조지 웰즈의 <우주전쟁>이나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를 입문하고, 소년기에 아이작 아시모프나 마이클 크라이튼 등 몇몇 영미 작가들의 작품들을 접하고 SF 장르를 접는다. 블록버스터 Sci-Fi 영화에 밀렸기 때문이기도 하겠고, 실생활에 접하기 쉽지 않은 난해한 과학용어가 점철된 책을 보고 있다보면, 참고서, 전문서적, 인문학 서적도 아닌 것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골머리를 싸며 읽어야 하나 싶은 자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독 작품 중에서도 그나마 SF를 빙자한 <은하영웅전설> 은 애니메이션 활극 같아 진입 장벽이라도 낮지만, 바이블 급의 <듄>, 블랙 코미디의 걸작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은 더 낮은 인지도로 인해 완독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어 왠만해선 읽으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베르나르 베르베르, 코니 윌리스가 버텨주고 있고, <헝거게임>, <메이즈 러너>, <다이버전트> 등 가벼운 영어덜트 소설의 부상과 디스토피아 소재의 인기로 독자층이 늘어서, 그간의 좁았던 입지가 어느 정도 나아지긴 했다.
한국에선 천시받는 장르 문학에, 그중에 제일 안팔린다는 SF소설인데다, 국내작가의 소설이다. 첩첩산중에 설상가상. 한마디 더하자면, 기존 주 타겟층이 남성인SF 장르의 이 책 제목은 <청혼>. 사이언스 픽션을 빙자한 연애소설이다. 또 그렇다고 여성층을 노렸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주인공은 우주에서 군복무를 하는 상황이라 내용의 태반이 교전 중인 상황을 다루어서 연애소설을 빙자한 SF 밀리터리물에 가깝다. 심지어 여성들이 듣기 싫어한다는 군대에서 축구했다는 에피소드까지…이 작가는 도대체 책을 팔 생각이 있는 걸까?
책을 펼치면 극악무도함을 바로 맛보게 된다. 예전과 다르게 큰 글자체에 자간과 행간을 늘리는 게 일반화되었다지만, 한 페이지 마다 달랑 11줄. 요약본도 아니고. 단편에 가까운 소설을 일부러 늘리고 늘려 256 페이지의 장편소설로 팔려는 출판사의 사기에 가까운 상술이 보여 화가 치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 보면 화가 누그러지는 것이. 넓은 지면에 알알이 박힌 몇 자 안되는 글자들이 우주 공간의 별들 같아서. 오히려 이 과학소설과 어울리는 배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편집자를 용서한다. 욕먹는 레이아웃은 글과 어울리는 책을 내려는 용기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콩깍지가 단단하게 씌워졌다.
이 책은 반란의 모함과 적과의 교전 중인 우주 함대가 배경이다. 함대에서 군복무를 하는 주인공이 마지막 임무를 떠나기 전에 귀환하는 동료에게 부탁해서 지구에 사는 연인에게 편지들과 함께 반지를 전달하며 청혼을 하는 것이 주 골자이다. 간간히 보여지는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당연시되는 일상이 현재의 생활상과 비교하면 정체 또는 퇴보의 느낌을 주는 것이 흥미롭다.
서로의 거리가 몇 십 광년이라서 한 문장을 통신해도 지구에 닿는데 17분 44초가 걸리는 시간 차를 두고 하는 장거리 연애담. 휴가를 받으면 170시간을 날아 지구에 도착해 40시간을 같이 함께 하고, 다시 170시간을 날아 돌아와야 하는 만남. 먼 미래 얘기임에도, 과거의 연애방식을 닮은 듯한 아날로그 시대 같다. 남자가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하는 것이, “보고 싶었어” 하고 말했을 때, “나도” 하고 대답해주기까지의 시간이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순간이라고 적었을 때. 이 소설은 내 심장에 박혀 반추되리란 확신이 들었다.
후일담을 들으니, 작가가 처음 단편으로 완성된 것을 몇 년이 지나 중편으로 개작했다가 다시 전쟁 부분을 늘려 장편소설로 기획 출판된 경우라고 한다. 그렇다면 몇 년후에라도 다시 보완해서 더 완전한 장편소설로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램도 든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움이 좀 남는 열린 결말이라, 그의 전작 <타워>처럼 연작소설로 해줘도 좋고. 이 이야기 계속 이어주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이런 감질나는 SF소설이라니 참…
“ 그러니까 그 말씀은 우주 같은 데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는 거죠? 하루하루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만 해도 충분히 벅차고 고달프시다고요.
죄송하지만 선생님, 지금 선생님이 타고 계신 이 지구라는 우주선은 무려 초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고요. 또 이 태양이라는 별은 초속 220 킬로미터나 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수십억 년째 은하계 외곽을 날아가고 있거든요. 게다가 우주선의 위도 37도 부근에 설치된 서울이라는 이름의 이 비좁은 객실은 대략 초속 370미터 정도의 속도로 우주선 둘레를 빙글빙글 돌고 있지요.
.. 그러니까 선생님이 우주인이 아니라는 말씀은 제발 그만두세요.
이 비좁은 객실을 자꾸 세상이라고 부르지도 마시고요.
자,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지구에 탑승하신 목적이 뭔가요? “
– 서문 중에서
우주공간에 떠 있는 일이 늘 조난당한 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주위의 빈 공간에 비해 우리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야. 지구만 한 공간에 우주선 딱 한 대니까. 조난. 그래, 그건 조난이야. 무언가에 깊숙이 잠겨버리고 만다는 뜻이야. 어둡고 고요하며 거대하고 또 막막한 무언가.
-본문 중에서

『청혼』 배명훈 저. 문예 중앙. 2013년 초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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