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린의 소설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읽었다. 문학동네 출판으로 2004년 1판 28쇄본이었다. 오래 전에 구입한 책을 불현듯 읽고 싶어서 꺼내 들었다. 한 번은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한 번이 언제였는지, 그리고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과대한 다독 탓이라고 치부하지만, 사실 지금껏 읽은 책 중에 재독을 여러 번 하지 않은 이상 스토리가 기억나는 책들은 몇 안 된다.
어쨌든, 사랑은 교훈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실존적으로 하는 거다. 어느 시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서른 살이 넘으니 세상이 재상영관 같다고. 단 하나의 영화를 보고, 보고, 또 보는 것 같다고. 대체 우리는 어떻게 성숙해야 하는 것일까... 선은 텅 비고 추상적이기만 하고. 일상은 자고 먹고 섹스하고 사냥하는 욕망의 습관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니. - p102

구입 동기는 여성 작가의 소설을 읽고 싶어 한 어머니에게 사드린 것으로 생각된다. 신경숙, 박완서, 은희경 등의 작가들의 소설들과 함께 구입했던 것 같다. 여성이 쓴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기에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여성들의 이름만 골라서 구입했던 시기였다. 이번에 책을 읽고 나니 당혹스러웠다. 소설이 너무 화끈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대부분의 책을 읽으셨지만 몇 권은 맞지 않는다고 돌려주셨던 기억이 났다. 아, 내가 미쳤었구나… 역시 책 선물은 읽고 나서 주는 것이 리스크 관리에 좋다.
출판사의 책소개 편을 보면, ' 사랑이란 열망하면 할수록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근본적으로 불온한 정열임을 그려내 보이는 한편, 불온한 욕망, 모호한 생의 불안으로부터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전경린 문학의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한 문제작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제작이라는 표현은 잘 모르겠다. 한마디로 불륜에 관한 책이라, 이런 소재는 드라마와 소설에 흔해져 버린 이야기이기에 확 와닿지는 않는다. 1999년에 이 책이 처음 출판되었다. 1990년대 후반 한국 문학사에 여성의 욕망을 다룬 급진적인 내용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그때 당시 와타나베 준이치의 일본 소설 [실락원]의 인기가 한국에 몰아치고 난 후의 시기가 맞을 것 같다. 실낙원은 성인 소설이었고 2010년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와 같이 여성 독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다. 아마 섹스에 대한 여성의 주장과 표현이 개방되던 시기라 이 책도 그 흐름을 탔을 수 있겠다.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다. 작가의 필력과 인지도가 받쳐주니 그것이 인기의 주된 요인이었겠지. 알고 보니, 이 소설을 기반으로 [밀애]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필히 시청해야겠다는 호기심이 들었다.
세상이 이렇게 고요할 수가 있을까?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그 적요는 아주 독특했다. 마치 노래를 지워버린 빈 테이프가 돌아가는 것처럼. 흡사 이제 네가 노래할 차례야, 라며 고요히 기다리는 것처럼. -p34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다.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던 주인공인 미흔은 대학에서 스물한 살에 만난 효경과 결혼해서 아이 하나를 낳고 살고 있었다. 남편은 인쇄소를 하며 바쁘게 살았고 그녀는 집에서 육아 담당 주부였다. 어느 크리스마스날 영우라는 아가씨가 집에 찾아와서 효경과 몇 개월간 불륜을 저질렀다고 고백한다. 아기를 지웠다고 집안을 뒤집어 놓은 데다 그녀의 머리를 후려치고 떠난다. 남편의 외도로 충격을 받은 미흔은 남편과의 관계가 서먹해지고 대화가 없어진다. 효경은 관계 회복을 위해 인쇄소를 정리하고 시골로 이주해서 작은 서점을 운영한다. 그렇지만 관계는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사설 우체국을 운영하는 한 남자 규를 만난다. 잘생기고 훤칠한 유부남인 규는 미흔에게 구름 모자 벗기 게임을 제안한다. 조건 없이 사랑을 나누되 먼저 사랑을 고백하면 지는 게임으로, 기간이 끝나면 헤어지는 불륜 제안이었다. 어느샌가 그녀는 그와의 밀회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실은 그 숲처럼, 숲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처럼 맹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설래야 바로 설 수 없이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소용도 없이 미친 듯한 바람에 갈래갈래 쥐어뜯기고 있었던 것이다. ... 욕망에 빠져드는 일이 이렇게 슬프고 무서운 일인가...... -p195
순수문학 소설인 이 책을 로맨스 소설이라 단정하는 것은 어폐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쓴 로맨스 소설로 읽혔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추리소설로, 카프카의 [단식 광대], [변신] 등은 공포소설로 받아들이는 내겐 장르소설로 지칭하는 것은 폄하나 비하가 아니다. 물론 주인공 미흔의 행동을 이해하거나 동의하지 못하고, 마지막 결정도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그녀에 대해 분노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또 생각해 보면, 독자들에게 토론의 다양한 주제를 던져 주었으니, 문제작이 맞는 것 같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표현들은 나를 사로잡았고 그녀의 다음 작품도 찾아보고 싶게 했다. 어떻게 외설과 순수문학의 줄타기를 이렇듯 잘 해냈을까. 섬세한 감정의 서사와 장면의 묘사는 또 어떠한가. 재능인지 노력인지 모를 그 결과물에 부러움을 한껏 품는다. 어렸을 적에는 로맨스 소설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요즘 들어, 로맨스가 눈에 들어온다. 브리저튼도 재미있고, 오디오북 구독 서비스 윌라에 있는 판타지 로맨스들도 흥미롭다. 로맨스 웹소설들도 상상의 재미가 넘쳐 주변 몇 사람들에게 추천했더니 너무 달달해서 못 읽겠다는 답을 해 왔다. 이런. 나만 여성 호르몬이 증가하고 있는 건가?

전경린
1995년 '동아일보' 중편소설 부문 등단. 한국일보 문학상(1996), 문학동네 소설상(1997), 21세기 문학상(1998), 대한민국 소설문학상 대상(2004), 이상문학상(2007), 현대문학상(2010), 현진건 문학상(2016) 수상. 『염소를 모는 여자』 『바닷가 마지막 집』 『물의 정거장』 『내 생애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황진이』 『풀밭 위의 식사』 『최소한의 사랑』 『사교성 없는 소립자들』 『자기만의 집』 『얼룩진 여름』 등 출간.
수상 : 2010년 현대문학상, 2007년 이상문학상, 1999년 김준성문학상(21세기문학상, 이수문학상), 1997년 문학동네 소설상, 1996년 한국일보문학상,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작가소개 출처: 알라딘 북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393594&start=pcsearch_auto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6 | 전경린
작가의 두번째 장편소설로, 사랑이란 열망하면 할수록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근본적으로 불온한 정열임을 그려내 보이는 한편, 불온한 욕망, 모호한 생의 불안으로부터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www.aladin.co.kr
이 책을 읽는데 선미의 보름달이 생각났다. 괜히 두근거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8BBF3vRY8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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